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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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5일에 이글루스 블로그에 썼던 글입니다. 우연히 아래에서 언급되는 책이 작년에 우리나라에 <내 귀에 바벨 피시: 번역이 하는 모든 일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념(?)으로 과거 글을 올립니다.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특히 시의 번역에 있어서 그러한 이야기들이 많죠. 제가 다른 분들과 함께 박상륭 선생을 뵐 때마다 자주 듣는 이야기 또한 ‘과연 선생님의 소설이 번역이 가능하겠는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선생의 문체 등에 대한 경외의 염으로 하는 말이지만요.

작년에 데이비드 벨로스David Bellos의 <Is That a Fish in Your Ear?>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벨로스는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로, 조르주 페렉의 소설을 번역하여 상을 타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올렸던 구글 번역기에 대한 글도 바로 이 책의 일부입니다. 번역이란 건 결국 언어와 직결되는 것인지라 책에서는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언어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한번씩 다루는 것 같더군요. EU에서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최초의 동시통역 시도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이야기 등등 무척 흥미로운 사실들도 읽을 수 있었고요. 번역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완전한 번역’, 다시 말해 시의 번역 문제를 다룬 장도 있었습니다. 보통 어떠한 번역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시의 번역에서처럼, 번역을 하면서 ‘뭔가’를 잃어버린다고 여길 때이지요.

그러나 벨로스는 미국의 언어철학자 제롤드 캐츠Jerrold Katz의 논의를 빌려, “사람이 하는 어떠한 생각이든 어떠한 자연언어로 표현이 가능하며, 한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은 다른 언어로도 표현이 가능하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은 번역이 불가능하며 언어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번역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실 중 하나는, 모든 것은 번역 가능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원래의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가? 벨로스는, 그렇다면 대체 당신이 말하는 그 ‘원래의 느낌’이란 무엇인가를 말해보라고 합니다. 각운? 음보? 이런 것은 물론 쉽지는 않지만 해당 언어에 맞게 살려서 번역이 가능합니다. 호프스태터가 마로의 시에 대해서 쓴 책이 바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거치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벨로스는 여기에 더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NASA에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발견하여 우주선을 보냈고 승무원들은 행성을 방문하고 무사히 돌아옵니다. 중대발표를 할 거란 소식에 기자회견장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그 행성에는 생물체가 살고 있었고 그 생물체는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

“아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럼 그들이 무어라 말하던가요?”

“음… 그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완전히 번역이 불가능하거든요.”

(여기서 잠시 질문자의 기분을 헤아려 봅시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자신이 원래 좋아하던 시에서 원래의 시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을 못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정확히 하려면 먼저 두 개의 언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있어야 할 뿐더러, 그 ‘원래의 느낌’이란 것은 대부분 개인적인 감정에 불과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도 여기에 덧붙일 수 있겠죠. 우리가 통상 번역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언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게 벨로스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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