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장성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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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란 표현을 쓴다. 북한, 그것도 권력 최상층에 관한 이야기는 그 특성상 ‘만지는’ 정도도 되기 어렵다. 최상층 인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여기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보를 얼마든지 왜곡 및 날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간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엄존한다. 장님들이 각자 자신들이 코끼리라고 생각한 것을 찍어온 사진들을 모아 조합하여 코끼리를 만드는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날고 기는 미국의 정보력도 인적정보HUMINT 부문에서는 딱히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이 상황에서 정보 수집의 범위를 넓힌다고 해서 정보가 정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염도가 높아지면서 배가 산으로 가버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북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국내 언론보도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억측으로 가득한지 (어떤 경우에는 국정원의 심리전으로 여겨질 정도다) 잘 알 것이다.

라종일 교수의 신간 <장성택의 길>도 이런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나마 저자가 나름 신뢰할 만한 증언(차마 공개할 수 없었다는 출처들을 포함하여)들을 모아 재구성한 것이며, 미주를 참고하지 않으면 책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각기 다른 출처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솔기 없이 깔끔한 연결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이점이 나의 의심(?)을 자극한 측면도 있다. 이 정도의 인물에게서 모순된 평가(그리고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저자가 국정원 1차장 등의 정보 관련 중직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정보과 그 해석에 대해 상당한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저자가 정말로 국정원 재직 당시에 일급의 정보에 얼마나 접근이 가능했는지 등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는 전문가들도 있기 때문에 책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보다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그러한 정보 및 해석의 신뢰도보다도 ‘장성택’이라는 인물을 포착해낸 저자의 감수성에 있다. 이는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인데, 모두의 시선이 아웅산 테러 자체에 쏠려 있었을 때 저자는 시선을 돌려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쓸쓸히 이역만리 타국에서 최후를 맞이한 북한 공작원의 여생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그 덕택에 단순한 테러 공작의 배경과 진행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분단 상황의 비극성을 다시금 곱씹게 해주는 작품이 되었다.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오직 혈통만이 의미를 갖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얼마나 ‘혈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인가!)에서 장성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의 딸과 결혼하여 그 혈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결코 그 혈통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운명이었다. 그 본질적인 차이가 비참한 말로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장성택은 자신의 운명이 이미 그렇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치학자이자 교육자이자 공직자였던 라종일의 예리한 ‘작가적 감수성’을 다시금 느꼈다.

우연한 기회로 나는 저자가 이 책의 영문 번역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반도 정치에서 ‘혈통’이니 뭐니 하는 참으로 조선스러운 (이는 남과 북을 별반 가리지 않는다) 관념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책이 될 것이지만, 과도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사용으로 김정일이나 김경희, 장성택의 대사까지 관심법으로 꿰뚫고 읊어주는 감수성은 영문판에서는 좀 자제해야 진지한 서적으로 외국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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