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다 엠폴리, 포식자의 시간
줄리아노 다 엠폴리Giuliano da Empoli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로 요즘 유럽 국제정치판에서는 상당히 핫한 인물이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랑은 개인적으로도 친해서 마크롱의 유엔 총회 및 사우디 방문에 동행하기도 했고,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도 그에게 종종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괴거 이탈리아 총리 보좌관도 하는 등 현실 정치에서 활동하다가 환멸을 느껴 작가로 전향했다고 하는데 2022년에 데뷔작인 ‘크렘린의 마법사’가 베스트셀러도 됐고 상도 받았다. 소설은 푸틴의 미디어 전략가에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주변 인물들은 푸틴을 비롯해 거의 모두 실명으로 등장한다.
올해 10월 영문판이 나온 에세이집 ‘포식자의 시간The Hour of the Predator‘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제목처럼 세계 정치를 주무르는 ‘포식자’들을 다루는데 트럼프, 빈살만, 부켈레 같은 인물이야 예상 가능한데, 샘 올트먼이나 에릭 슈미트 같은 테크 거물들까지 다룬다는 게 흥미롭다.
작가는 이들을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지아에 빗대어 ‘보르지아적 인물’이라 부른다. 원칙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결과로 입증하는 스타일이란 것이다. 실리콘밸리 CEO들이나 스트롱맨이나 본질은 같다. 아니, 오히려 실리콘밸리의 CEO들이 더 무서운 존재들이다.
기술과 정치의 결합에 대한 섬뜩한 통찰은 ‘크렘린의 마법사’ 후반부 독백에서도 드러난다. 이전에는 댓글 부대 동원해서 여론 조작하는 수준이었는데(이게 발전한 게 캠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이다) 이제 AI와 결합하면 인간을 초월한 신이자 괴물이 되어 정치를 집어삼킬 거라는 예언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대심문관’ 파트처럼 그 부분만 따로 떼어 놓아도 작품이 될 만하다. 그래서 저자의 다른 인터뷰를 보면 AI 규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더라.
책 내용도 좋지만 솔직히 더 부러운 건 저자의 위치였다. 현실 정치에서 구르다 나와서 소설과 에세이로 통찰을 풀고, 정치인들은 다시 그를 찾아 지혜를 구한다. 작가는 그 덕에 빈살만도 만나고 샘 올트먼, 얀 르쿤도 만나면서 새로운 소스를 얻는다.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저자가 트럼프 승리 이후 오바마 재단 행사에 초청받았는데, 소위 ‘미국 리버럴’ 특유의 그 작위적인 분위기—모두의 발언권을 존중하고 억지로 어울리는—를 겪으며 “미국 좌파는 진짜 답이 없구나”고 느꼈다는 대목도 너무 웃겼다. 한편으론 미국과 유럽은 이렇게 교류를 잘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에겐 이런 ‘가교’가 너무 없다. 내가 잘 몰라서일지도 모르지만 다 엠폴리처럼 양쪽을 오가며 판을 읽어주는 중간자적 인물들이 안 보인다. 그러니 맨날 우물 안 개구리 식 담론만 도는 게 아닐까. 좋은 책도 부럽지만 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는 저 동네의 풍토도 부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