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예나 지금이나 첩보원들이 가장 애용하는 위장 신분이다. 중국 역시 이 고전적인 수법을 부지런히 활용 중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게 ‘기자 위장 스파이’ 사건이라지만, 이번에 유럽에서 드러난 사례는 독특하다.

발단은 지난 10월, 유럽 매체 Euractive의 보도였다. ‘폴리티코 유럽판’ 소속 기자가 브뤼셀에서 나토(NATO) 등의 국제기구 관계자들에게 집요하게 ‘성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내용이다. 오죽하면 서방 정보기관들이 중국과의 연계를 의심해 조사에 착수했겠는가.

지난 17일의 후속 보도에는 심지어 뉴스룸 내부에서도 동료들에게 유사한 행동을 일삼아 컴플레인이 접수되고 경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기사 말미엔 “해당 기자는 현재 유럽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꼬리가 밟혀 본국으로 도주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솔직한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구시대적인 성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기자’, ‘성적 접근’, ‘스파이’라는 단어의 조합을 보며 으레 미모의 여성 스파이를 상상했으니 말이다. Euractive 기사는 성별을 알 수 없는 ‘그들(they/them)’이라는 대명사를 썼다.

나의 이 안일한 상상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영국의 대표 타블로이드 ‘데일리 메일’의 보도였다.

  1. 그 기자는 런던으로 건너가 BBC에 취직했다. 영국에서도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BBC에서 이렇게 백그라운드 체크가 제대로 안 된다는 건 놀랍지 않다. 나처럼 거기서 일해본 사람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2. 그리고 놀라운 반전, 그는 ‘남자’였다. 그리고 다른 남성들에게 플러팅 공작을 펼치고 다녔다.

폴리티코 유럽을 거쳐 BBC로 이직한 남자 기자. 이 바닥에서 이 정도 단서면 누군지 특정하는 건 일도 아니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역시 내가 예전부터 트위터에서 팔로우하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내 지인도 그에게 실제로 ‘접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라이버시 문제로 상술할 순 없으나, 지인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이는 개인의 일탈이 아닌 중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판을 깔아준 공작임이 명백해 보인다.

지금 서구 국가들은 중국의 전방위적 첩보 작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는 “중국의 침투에 캐나다는 사실상 패배했다”는 자조 섞인 분석이 담긴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쯤되면 자연스레 드는 의문. 과연 한국은 어떨까? 사실 너무 경각심이 없다. 조만간 PADO 매거진에서도 최근 발간된 중국의 정보 작전 관련 서적들을 묶어 종합 서평을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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