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의 저자를 팔로우하고 있었다.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젊은 연구자들이 사상의 노점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들을 그러모아 대강 싹틔운 글들은, 햇빛을 못 받고 자란 모종이 그렇듯 웃자라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도 못하고 장대비 한 번이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기 일쑤인데 저자의 글은 (다 동의하지는 못해도) 늘 뿌리가 잘 박혀있다는 느낌이었다. 진지한 고민의 산물이라서일 것이다.
그가 책을 냈다고 하여 내심 반가웠는데 그게 윤석열 정부 비판서라고 하여 처음에는 다소 실망했다. 그런 지엽적인 이슈보다 좀 더 큰 문제를 다뤄줬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읽어보니 실제로 이 책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파성에서 벗어나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 꽤 오래 전부터 특정한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과거에도 결코 강력하진 않았지만 정당이 점차 형해화되고 있다. 과거에도 탁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치 엘리트의 질이 점점 쇠락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과 실패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그와 함께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와 과제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저자가 보는 한국 정치의 문제는 ‘사적 자치’를 가진 ‘공동체’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근대사회에서는 상원이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하원과 군주권을 대표하는 행정부 사이를 규율하며 ‘매개의 작용을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상원이 태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결해줄 중간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욕구들이 공개적인 토론과 협의를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계기를 상실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시아적 사회에서 정당정치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서구적 형태를 모방하였을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사적 이해관계들을 조직하거나 대표하지 못하고 언제나 처음부터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달리 표현하면 ‘관료제’의 입장에서 정치를 행하게 된다. 거의 공기업 수준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재정적 자립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정당조직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지적은 더욱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p.218)
아시아적 사회에서는 이미 ‘전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전체밖에 없기 때문에 ‘부분’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부분에서 전체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유럽형 발전방향과는 반대로, 전체에서 부분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시아적 발전방향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들의 오랜 지론인 비례대표제 확립은 전제주의적 사회에서는 오히려 정당을 시민사회로부터 ‘분리’시켜버리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p.220)
말로는 쉬워보여도, 동네 민원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리고 나랏돈 투입되는 지원 사업을 끼지 않고 창업하면 바보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벌써 5년째 가족의 지역 공동체 프로젝트를 돕고 있지만 한국인 평균은 얄팍한 카테고리의 가족과 직장 외에는 공동체라는 걸 경험해 본 적도 알지도 못한다. 주민자치회를 가보면 다들 ‘민원’ 제기에 여념이 없고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지역 공동체가 없으니 지역 정치도 없다. 지방 정부에서 뻔한 예산 낭비성 사업만 추진한다고 공무원들을 나무라지만 애당초 정말로 지역에 필요한 사업을 그 지역의 공동체에서, 지방 의회 등을 통해 제안했다면 그럴 일이 있었겠나.
상당 수준 경제 고도화를 이룬 상황에서, 이제는 과거처럼 소수의 visionary가 내놓는 빅 아이디어보다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전문가들이 내놓는 아이디어들을 촘촘하게 엮는 게 한국 사회가 부딪히는 문제에 더 절실한 것 같다. 정당법을 개정해 지역정당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작이 되지 않을까? 분명 처음엔 해방공간 시절 같은 혼란이 펼쳐지겠지만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저자는 한국이 ‘아시아적 발전방향’의 초석을 마련하고 이를 글로벌 차원에서 리드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고 본다. 십분 동의하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1990년대 이래로 과거사 재해석을 통해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개발 등의 현실적인 자본 부족 문제 를 해소하려 시도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문제 삼아왔다. 한국은 이러한 흐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한국이 새롭게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지역 및 사회들과 연대하며 도덕적 헤게모니를 주장하기에 대단히 좋은 조건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면서 동시에 선진화되고 있는 경제, 거기에 식민지배 문제를 주도할 수 있는 식민지배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은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며 나타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 정부, 특히 문재인 정부는 그러한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결국에는 중견국가 수준에 걸맞는 이념적 기반을 창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p.150)
전제주의 극복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까지 갖춘 과제이다. 마르크스가 보나파르티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 을 때 그는 유럽 사회가 ‘아시아화’되고 있다고 보았다. 아시아적 세계에서 벗어난 유럽 지역이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다시금 아시아처럼 전제화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적 함의를 지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아시아인들이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영역을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 아시아인들이 전제주의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때 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전제화되고 있는 유럽, 미국 등 다른 사회에 희망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p.264)
저자는 헤겔-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정치 상황을 고찰하면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진보파의 입장을 거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미 기획했던 저작들도 조만간 읽어볼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