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테크의 우월함: 안전 면도기의 경우
난 하이테크에 쉬이 매료되는 사람이지만 돌이켜보면 하이테크가 늘 우월한 건 아니다.
우월하다는 총평에는 많은 평가요소와 가치관이 개입한다. 보기에 미려하고 효과적이지만 이를 유지하는 데 불필요하게 많은 자원이 소모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 핫한 생성AI부터 내가 요즘 탈피하려고 하는 워드프레스 같은 dynamic website가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static website는 상대적으로 ‘로우테크’면서 효율적이다. 그런데 마크다운, HTML, CSS까지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요구하니 이거 로우테크의 정의를 다시 물어야 할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로우테크의 우월함이 빛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자신있게 꺼내들 수 있는 사례는 바로 면도기다.
어릴적엔 가격도 더 비싸고 각종 기술들이 들어가니 전기면도기가 더 좋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내 예산 범위 안에 있는 제품을 사서 썼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서 수염이 더 굵고 빠르게 자라니까 전기면도기의 단점이 점점 눈에 띄었다. 깨끗하게 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기면도기 광고의 백인 남성은 늘 면도 후에 거울을 보며 활짝 웃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여전히 미진한 부분을 바라보게 된다. 만족스럽지 않아 똑같은 부분을 계속 문지르니 피부가 빨갛게 붓기도 일쑤다.
3중날 4중날 5중날이 나오는 카트리지 면도기들은(요즘인 6중날도 나오려나?) 좀 더 낫지만 쓰다보면 뭔가 호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 면도기 손잡이가 포함된 세트야 그래, 전체 세트를 사는 거니까 이 정도 가격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중에 날만 사려고 해도 손잡이 자루가 포함된 세트와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정확히 프린터 판매 비즈니스 모델이다: 프린터는 싸게 드리고 잉크, 토너로 거기 호구왔능가.
한 10년쯤 전부터 나는 한국에서는 보통 ‘클래식 면도기’라 부르는 안전 면도기safety razor를 써왔다. 그전까지는 주다스 프리스트 앨범 커버에서만 봤던 바로 그 옛날 면도날을 쓰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장점은 경제성이다. 싸다. 카트리지 면도날과의 가격 차이는 압도적이다.
면도의 품질 측면에서도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카드리지 면도날에 뒤지지 않는다. 초심자도 몇번 조심해서 해보면 내 피부와 수염에 맞는 면도 방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설사 베이더라도 면도날이 예리하기 때문에 상처는 금방 아물며 흉터가 남는 경우는 없다.
하나 번거로운 것은 아무래도 피부가 충분히 습기를 먹은 다음에 해야 아프지 않고 깨끗하게 면도가 된다는 것인데 나의 경우는 샤워를 하고 마지막 단계에 면도를 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요즘 들어서 더욱 주목할 만한 장점이라면 지속가능성이랄까, 플라스틱 쓰레기가 안 나오게 되니까. 미국 등지에서는 아예 업체들이 사용한 날들을 수거해서 재활용에도 쓴다니 부러운 일이다.
안전 면도기의 양대 산맥인 Merkur와 Edwin Jagger를 오랫동안 쓰다가 재작년부터는 이 지속가능성에 더욱 마케팅 포인트를 잡고 있는 Leaf라는 회사 제품을 쓰고 있다.
면도날 각도도 적절하게 잡혀 있고 면도기 핸들도 특수 코팅이 잘 되어 있어서 2년째 쓰고 있지만 석회 같은 것이 거의 끼지 않는다. (이는 Merkur와 Edwin Jagger 모두 겪었던 문제다.)
Leaf 면도기의 독특한 특징 하나는 양날이 아닌 외날 면도날을 쓴다는 것이다. 외날을 따로 구매할 필요가 없다. 기존의 양날 면도날을 반으로 접어서 쪼개면 된다.
이게 의외로 좋은 포인트인 게, 사실 보통의 면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양날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슬랜트 면도기의 경우 양날이어야 그 모양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랜트는 너무 공격적이다. 면도날이 습기를 먹으면서도 무뎌지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양날을 쪼개서 외날로 쓰면 훨씬 더 오래 쓸 수 있다.
Leaf에서 외날 3개를 연이은 버전도 파는데 이 제품은 제모용으로 훨씬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