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원리
출간되자마자 많은 추천을 받아 읽어봤는데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봐야 할 책이다. 더 긴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고 내가 밑줄쳤던 대목들을 공유한다:
한국 정당의 문제점
국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유는 정당에 기대하는 순기능에 있다. 앞서 논했듯이 정당은 사회 각계에서 표출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여 공익에 부응하는 정책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업으로 삼는 경험과 실력을 갖춘 정치인들을 길러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은 공직 후보자를 키우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선거에 나설 인사는 당장 외부에서 영입한다. 그리고 한두 번 당선되고 나면 다른 영입 인사로 교체해버린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3선 초과 금지를 정치 개혁이라며 법제화하려 하기까지 한다. 국회를 초·재선 의원만으로 채우겠다는 뜻이다.
당원도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노동조합•경제 단체•의사협회 등의 직능단체와 협력하며, 지역과 사회경제적 문제를 연계해 당 차원에서 논의하는 당원들은 어느덧 뒤로 밀려났다. 대신 온라인상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는 팬덤 당원들이 당대표 선출부터 공천까지 좌지우지한다. 일부 정당에서는 직접민주주의라며 당원들이 당대표와 직거래하고 홍위병처럼 극렬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팬덤 당원들과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들이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당쟁에 동원되고, 초짜 의원들이 당론에만 끌려다니다가 그냥 버려지는 형국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정책 정당의 길은 요원하다. (p.158-159)
관료제 통제의 문제
그런데 관료들은 정책 변화를 추구하는 집권 정치 세력을 기만shirking 할 수 있는 구조적 능력을 갖고 있다. 먼저 해당 정책 분야에서 정치가보다 우월한 정보력과 전문적 능력, 경험을 갖고 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이론과 경험을 들어 집권자를 설득한다. 아마추어인 정치인이 전문가를 이기기는 어렵다. (p.264)
정권 교체가 발생하는 한, 관료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강압적인 방식으로 관료제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부처별로 ‘적폐 청산 태스크포스’조직을 만들고, 자체 조사 후 전임 정권의 정책을 추진했던 공무원들을 무더기로 수사 의뢰한 것이나, 윤석열 정부가 감사원을 통해 사실상 표적 감사를 실시한 것 등이 그러하다. 책임은 담당 공무원이 아닌 정치인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지부동이 심해진다. 아무도 열심히 정책을 만들고 집행에 나서지 않게 된다.
자꾸 강압적 통제 수단에 손이 가는 이유는 집권은 했으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책 정당으로서 미래 국가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 관료제를 이끌어가는 능력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5년을 주기로 정당도 아닌 대통령 후보 캠프를 중심으로 일회성 선거용 정책 대안(공약)이 급조된다. (p.273)
민주당의 다수당 독주 체제
그러나 2020년 21대 국회에서 여당이던 민주당이 183석이란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면서 민주화 이후 어렵게 한층 한층 쌓아왔던 합의제에 의한 국회 운영은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 제1당이 국회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등 18개 상임위원회의 상임위원장직을 모두 독차지한 채 국회가 개원했다. 민주화 이후 3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야당인 자유한국당(현 국민의 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주도로 통과시켜버리기도 했다. 권위주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다수당 독주 체제로 회귀한 것이다. (p.244)
‘제왕적 사법부’는 결국 정치의 실패 문제
그러나 제왕적 사법부라고 평하는 것은 지나치다. 가장 큰 이유는 사법부에 의제 설정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법원 스스로 위헌 법률과 위헌적 행정을 찾아 나서지 못한다. 법원은 소송이 들어와야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 사법 적극주의는 정치인과 시민단체들이 “다른 수단의 정치” 차원에서 사법부를 정치의 장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발생한다. 시민단체나 이익단체들이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의회에서 제때 시대 변화에 걸맞은 의사결정이 내려진다면, 그리고 설사 이견이 있더라도 모두가 승복하는 정치 문화가 자리 잡았다면, 정치 문제를 사법부까지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과 분쟁이 정치 과정이 아닌 사법 과정으로 해소되는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 적극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당정치가 쇠퇴하고 진영간 대결의 정치가 심해질수록 위헌 소송을 걸고, 무슨 무슨 가처분 소송을 내고, 형사 고발에 고소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발의되는 특별검사 또한 빈번하게 활용된다. (p.324-325)